잡동사니
매화음 梅花吟 / 이형권
산그림
2013. 3. 16. 15:16
매화음 梅花吟 / 이형권
香아, 뜰앞에 매화가 피었다.
이월 스무날 빈집에 홀로 앉아 어둠과 마주 하고 있다.
봄밤은 마치 시린 강물이 흐르는 듯하다.
지난 겨울 풍설을 다 여의지 못한 듯
바람끝에는 만상의 슬픔이 묻어 있다.
香아, 숲속에 젓대 부는 아이도 없고
무릎 위에 놓인 거문고는 소리가 멎었으니
인생의 반은 병중이었고 반은 고단한 날이었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성급할 일도 노여워할 일도 안타까워할 일도 아니었거늘
어리석고 어리석었을 뿐이었다.
香아, 사는 일이 추위 속에서 꽃을 피우는
저 매화나무의 일보다 부끄러움이 많으니
밤을 새워 못내 뒤척인다.
메마른 등걸에는 온기가 사라졌고
한 가지는 꺾어져 이미 자태를 잃었으나
천지에 봄을 알리는 향기 그윽하니
어찌 사무치지 않을 수 있겠느냐.
香아, 어제는 싸락눈이 내렸고
오늘은 서풍이 분다.
강물은 또 나룻배를 스치고 간다.
세상의 일들이 모두 이와 같을진데
마음결에 스미는 향기가 있어
매화꽃 피는 이 밤이 적막하지 않구나.
香아, 문을 열어다오
시나브로 달빛이 저물겠구나.